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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금융위기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출범의 교훈


1907년 미국의 금융위기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20세기의 금융위기 중 대공황을 제외하면 가장 심각했던 불황으로 이어지는 위기였다는 점과 중앙은행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마지막 금융위기였다는 점 때문이다. 중앙은행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많은 사람들은 바로 정책실패와는 관련이 없는 금융위기였다고 주장하는데 그에 대한 사실 여부를 살펴보고 또 중앙은행제도가 금융위기의 재발방지를 위해 도입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1907년에서 1908년 사이 8.2% 감소한 후 바로 반등하여 1909년에는 1907년 수준으로 회복하였다.1) 그렇기 때문에 위기의 파장이 단기에 그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인구 증가율이 높던 당시 미국의 상황에서 이 경기 후퇴는 1인당 GDP가 10% 넘는 감소를 가져왔고, 위기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는 데에는 5년이나 걸려 금융위기의 심각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경제통계를 갖고 있지 못한 당시 상황에서 위기 직후 그 파장의 심각성에 대한 전문가들의 판단은 엇갈렸다. 미국경제학회 회장을 지낸 컬럼비아대의 셀리그만(E. Seligman) 교수는 ‘온건한(moderate)’ 위기로 평가한 반면, 재무차관을 지낸 내쇼날시티뱅크(National City Bank)의 부행장 밴더립(F. Vanderlip)은 ‘역사상 큰 재난들 중 하나’로 보았다.2) 1924년 초판 이래 가장 많이 읽힌 『미국경제사』 교과서에 따르면 1907년 패닉으로 “많은 투기적 기업들이 파산했지만, 정부와 주요 은행들의 노력으로 패닉이 확산되는 것을 막았고, 그 파장은 주요 도시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부자들의 패닉’이라 불린다”.3) 이 같은 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위기 발생 이후 벌어진 책임공방에서는 “우리 경제제도의 바탕을 황폐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자행하는”4) 주식 투기꾼들의 책임으로 몰아세웠던 일부 반시장적 정치인들과 언론의 논조가 힘을 얻는 분위기였다. 그러면서 정설로 자리 잡은 1907년 에피소드의 해석은 작은 경기위축이 금융패닉과 그에 대응한 은행권의 지급제한 조치로 인해 심각한 불황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같은 해석은 연방준비제도의 입법으로 마무리되는 금융개혁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전개 때문에 1907년 금융위기에 관한 한 정부의 정책과는 무관한 위기로 치부되어 왔던 것 같다. 금융위기의 여건을 조성해 줄 통화정책의 실패를 탓할 중앙은행이 없는 마당에 모든 책임은 투기꾼들의 탐욕과 비이성적 시장의 합작품으로 보는 하이만 민스키나 찰스 킨들버거5) 식의 해석에 쉽게 머리를 끄덕였던 것이다.


그러면 당시 금본위 통화제도와 국법은행제도 하에서 통화정책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인가? 물론 지속적이고 효과적으로 통화제도를 관리할 능력을 갖춘 중앙은행과 같은 정부기관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은행권을 발행하는 국법은행들을 관리 감독하고 통화 공급을 조절하는 통화정책의 기능을 수행하는 주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재무성은 공개시장 조작이나 지급준비율의 통제와 같은 통화정책 수단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위기 시에는 정부자금을 특정은행에 예치하는 적극적 방식으로 통화 공급을 늘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재무성은 자신들이 중앙은행 역할을 매우 잘해 내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의 임기 내내 제기되어 온 중앙은행 필요성 논의6)를 불쾌해 하던 쇼(Leslie M. Shaw, 재임 1902~1907) 장관은 1906년 연차보고서에서 재무성이 ‘훌륭한 중앙은행’ 역할을 해냈다고 자평했다.7)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1907년 은행시스템이 그 어느 때보다도 대중들의 유동성 선호가 증가하는 상황변화에 매우 취약한 상태이었음을 지적했다.8) 이는 1879년 이후 나타난 두 가지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첫째는 1879년 현금 1달러에 예금 2달러이던 현금통화에 대한 예금통화의 비율이 꾸준히 증가하여 1907년 6월에는 6달러에 달했다. 둘째는 1879년 2월부터 1898년 6월까지 20년 동안 4.4에서 5.9로 서서히 증가하던 예금/지급준비금 비율이 그 후 9년 동안 급격히 증가하여 1907년 6월에는 8.9를 기록했다. 지급준비율의 급격한 감소는 자금시장 상황에 대한 책임을 점차 재무성이 떠안으면서 은행들이 지급준비금을 스스로 유지할 유인을 약화시킨 결과로 해석했다.


브루너와 카(Robert F. Bruner & Sean D. Carr)(2007)는 1907년 금융위기를 일곱 가지 요인의 상승작용이 만들어낸 ‘완벽한 태풍’으로 묘사하였다.9) 그들이 말하는 일곱 가지 요인은 건축물 같은 시스템, 활발한 들뜬 성장, 불충분한 안전장치, 역행하는 지도력, 실물경제 충격, 과도한 두려움ㆍ탐욕ㆍ기타 상궤를 벗어난 행태, 집단행동의 실패이다. 이 요인들은 금융 불안정성 가설을 제기한 하이만 민스키의 투기모형과 유사한 일련의 상황전개의 구성인자들로서 이 설명에 다른 점이 있다면 위기의 전제조건으로 금융시스템의 복잡성을 강조한 것이다. 금융시스템이 너무 복잡해서 무엇이 잘못될 우려가 있는지조차 파악하기 힘들 뿐 아니라 금융기관, 지역, 국가 간의 문제가 전파되기 쉬운 구조라는 것이다. 민스키 모형과의 또 다른 차이점은 민스키가 정책변수를 무시하는 데 비해 이들은 ‘불충분한 안전장치’, 즉 금융제도의 문제 내지는 규제의 실패와 ‘역행하는 리더십’이라 부른 정부정책의 실패를 추가한 것이다. 정부의 역할은 반기업적 정책뿐 아니라 중앙은행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재무성이 맡고 있던 경제의 유동성 수준을 조절하는 역할과 관련하여 일어난 실패였다. ‘불충분한 안전장치’란 상업은행은 보수적이고 엄격한 규제를 받는데 비해 급속히 팽창하며 상업은행 업무영역에서 경쟁자로 부상한 신탁회사들은 지준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아두어 위험한 자산이 신탁회사에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던 규제의 실패와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충격을 완화할 충격흡수장치가 없었음을 지칭하는 것이다.


브루너와 카의 분석이나 프리드먼과 슈워츠의 연구는 공히 위기의 원인제공자로서 정부의 역할에 면죄부를 주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중앙은행의 부재가 바로 정책실패의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1907년 패닉의 정책대응이라 할 수 있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eral Reserve System, FRB) 출범의 교훈을 살펴보자.10) 1914년 11월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미국에서 은행의 위기는 은행들 스스로가 해결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한두 곳의 은행에 예금인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지역 민간은행들이 공동 설립한 금융결제소는 예금의 지불정지를 선언하고, 큰 은행들 주도하에 문제은행의 지불능력을 평가한 후 예금지급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여 위기를 종식시켰다. 큰 은행들이 패닉 확산을 저지하는 노력에 적극 동참하는 이유는 자신의 은행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최종대부자로서의 중앙은행이 없기 때문에 은행들은 스스로 은행의 위기를 조기에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온 것이다.


1907년 위기에서 이 역할은 J.P.모건과 뉴욕의 퍼스트내셔널 뱅크 총재 조지 F. 베이커(George F. Baker) 그리고 뉴욕 내셔널시티 뱅크 총재 제임스 스틸먼(James Stillman)의 몫이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1907년 위기는 ‘부자들의 패닉’으로 끝났다. 같은 이유로 19세기 후반 국법은행 통화금융체제에서 발생한 금융위기들(1873, 1884, 1890, 1893)은 1907년 위기보다도 훨씬 가볍거나 원만한 위기들로 끝날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에 항상 조기진화에 진력해서 큰 위기로 확산되지 않은 것이다. 대형 은행들의 ‘도덕적 해이’ 문제가 없었다는 말이다. 1914년 이후 상황과 입장이 달라졌다. 과거 다른 소형은행들의 문제에 해결사 노릇을 하던 대형 은행들이 이제는 대마불사의 논리로 언제라도 FRB의 구원의 손길을 기대할 수 있는 입장이 된 것이다. 또 FRB의 테크노크라트는 내셔널뱅크의 대주주와는 입장이 다르다. 큰 부담 없이 소형은행의 파산을 지켜볼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프리드먼과 슈워츠가 보여준 것같이 대공황을 경험하게 되었고, 지금 또 다른 엄청난 금융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인들이 이 교훈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는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금융개혁안들이 보여줄 것이다.


김우택 (한림대학교 명예교수, wtkim@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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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BER의 공식 경기순환 통계자료에 따르면 1907년의 경기후퇴는 1907년 5월에서 1908년 6월까지의 13개월간

으로 이 기간 동안의 GDP는 11% 감소하였음.

2) Seligman, Edwin, The Currency Problem and the Present Financial Situation, A Series of Addresses

Delivered at Columbia University 1907-1908.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08. (Rothbard,

Murry N., A History of Money and Banking in the United States: The Colonial Era to World War II.

Ludwig von Mises Institute, 2002, pp.241-2)에서 재인용

3) Faulkner, Harold Underwood, Harry N. Scheiber, and Harold G. Vatter, American Economic History,

Ninth Edition. Harper & Row, 1976, pp.308-309.

4) 금융위기 발생 이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위기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즉흥연설에서 자신이 취한 정책

들은 금융위기와 무관하며, 모든 책임은 주식 투기에 있다면서 사용한 표현임. (Bruner, Robert and Sean

D. Carr, The Panic of 1907: Lessons Learned from the Market's Perfect Storm. Wiley, 2007, p.109).

5) Kindleberger, Charles P., Manias, Panics, and Crashes: A History of Financial Crises, Third Ed. John

Wiley, 1996.

6) 1896년 대통령 선거에서 통화금융제도가 최대 쟁점이었던 만큼, 통화 공급의 비탄력성 문제 제기와 함께

1898년부터 대형 은행들과 재계를 중심으로 국법은행제도의 개혁 논의의 일환으로 중앙은행제도 도입에 관

한 논의도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 그러니까 1907년 위기가 아니었더라도 연방준비제도가 입법되었을 가능

성은 컸다는 말이다.

7) Rothbard 2002, p.236.

8) Friedman, Milton and Anna J. Schwartz, A Monetar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863-1960.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3, pp.164-165.

9) 브루너와 카(2007)

10) 1907년 '금융 후진국’이었던 미국에 공황이 발생했다. 8000여 개의 기업이 쓰러지고 주가는 폭락했다. 일부

은행도 문을 닫았다. 국가적 재앙이 벌어졌지만 중앙정부는 무능했다. 미국경제의 토대인 자유방임과 지역

분권주의가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금융시장의 조기경보 체계는 말할 것도 없고 감독 기능조차 없었다. 정부

가 허둥대는 동안 ‘미국 금융계의 황제’였던 존 피어폰트 모건 1세(JP모건)가 나섰다. 그는 대형 은행들을 압

박해 투신사에 현금 지원을 하도록 했고 뉴욕증권거래소에 긴급 자금을 투입했다. 공무원에게 봉급을 줄 돈

마저 없었던 뉴욕 시에도 연리 6%의 수익채권을 발행토록 한 뒤 이를 은행이 사들이게 했다. 사태가 수습된

뒤 미국은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공황의 발생 주기가 갈수록 짧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은행은

철저한 상업적 집단이며 공익성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모건의 경고는 언제라도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샤

일록’의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의회는 우여곡절 끝에 중앙은행 설립 규정을 담은 연방준비제도법안을 통과시

켰고, 1914년 11월 16일 드디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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