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한국경제는 서서히 끓어가는 솥 안에 앉아 있는 개구리 형국이다. 이대로 가면 성장 엔진이 멈추고 말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만물이 생동하는 봄의 시작점에서 멕킨지 글로벌 연구소가 한국경제를 진단하며 내렸던 결론이다. 국내의 대표 경제전망기관인 KDI에서 내놓은 그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뿐만 아니다. 한국은 지금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전철을 그대로 좇고 있다는 경고음도 많이 들리고 있다. 한국경제에 대하여 눈부신 한강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는 줄고, 저성장 기조가 심화되며 갈수록 어려움이 커진다는 음울한 이야기가 늘고 있다.
문제가 심각한지라 정부 차원에서도 성장의 엔진을 되살리려고 창조경제, 규제개혁, 경제혁신 등 여러 방면에서 애를 많이 쓰고 있다. 당연한 노력이다. 이러한 시도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려면 무엇보다 먼저 경제성장에 영향을 주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무엇인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이 문제는 경제학의 오랜 관심사였다. 그래서 정형화된 이론도 확립되어 있다. 그러나 함정은 기계적 익숙함에 감춰져 있다. 먼저 오래된 이론에서 경제성장을 결정하는 핵심변수는 노동력, 자본, 기술수준의 세 가지로 압축된다. 질 좋은 노동력과 물적 자본이 많이 축적되어 있고 기술수준이 좋은 나라일수록 경제성장이 잘되고 소득수준도 높다고 보는 것이다.
오래된 이론에 따르면 경제성장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도 명확해진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첫째, 노동력 관련해서는 교육을 통해 인적자원을 개발하고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지 않도록 정책을 펼치는 것, 둘째, 민간투자를 독려하는 정책을 펼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정부가 직접 투자에 앞장 서는 것, 셋째, 연구개발과 과학기술 진흥정책을 통해 기술개발 역량을 높이는 것 등이다. 이 세 가지 모두, 의지만 있으면 추진하기도 어렵지 않은 일로 보인다. 그래서 경제성장에 목마른 나라는 누구든 경제학의 이 오래된 이론과 처방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론에 의하면 전부는 아니라도 대부분은 성공적인 발전을 이뤘어야 했다.
그러나 결과는 딴판이었다. 비슷한 정책을 펼쳐도 어디는 자본축적, 기술진보, 경제성장에 성공하고 다른 나라는 실패하였다. 온갖 노력에도 국가간 빈부 격차는 지속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하여 많은 나라들이 성장 정책을 펼쳤으나 성공에 이른 나라는 한국을 비롯하여 극소수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인도는 1951년부터, 한국은 1962년부터 실시했지만 한국은 성공했어도 인도는 그렇지 못했다. 이론과 현실 중 무엇이 문제일까.
게다가 한국은 (예를 들어 필리핀과 비교하면) 다른 나라에 비해 자본도, 기술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성장에 성공했다. 경제학의 오래된 이론은 자본축적과 기술수준을 경제성장의 선결조건이라 했는데 한국의 경험은 이와 전혀 달랐다. 1993년 노벨상을 수상한 노스(Douglas North) 교수의 설명대로 경제성장을 하면서 동시적으로 자본, 기술도 늘어났다.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자본과 기술의 축적은 성장 그 자체이지, 성장의 원인은 아니었다.
이와 같은 합리적인 의심은 90년대를 전후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경제성장의 동인을 설명하는 신제도경제학(NIE)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NIE 이론에서는 성장에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결정요인을 제도로 본다. 제도는 쉽게 이해하면 경제활동 게임의 규칙이다. 예컨대 운동 경기에서 규칙은 선수들이 지켜야 하는 제약(constraints)이면서 또 활용하기에 따라 구제를 받을 수 있는 유인(incentive)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 원리로 경제제도는 경제활동 참여자의 생산, 투자, 교환, 거래 조직화 의사결정 과정에 제약과 유인으로 작용하고, 따라서 나라 전체의 경제적 성과를 결정하는 핵심요소는 다름 아닌 경제제도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경제학 이론도 창조적 파괴 과정은 피할 수 없다. ‘경제성장의 관건은 제도에 달려있다’, ‘제도 경쟁력이 성장의 요체’라는 NIE 이론은 실증분석 결과, 사실로 확인되면서 기존의 성장이론을 밀어내는 중이다. 다보스 포럼을 주관하며 유명세를 타는 세계경제포럼(WEF)에서 2006년부터 세계 각국의 제도 경쟁력을 별도로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WEF 제도 평가항목은 사유재산권, 정치인 신뢰, 정부규제 부담, 정책결정 투명성, 법체계 효율성, 기업경영 윤리성 등등 총 21개에 이른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 제도 경쟁력의 문제는, 2014년도 세계 154개국 중에서 82위로 사실상 꼴찌라는 것이다. OECD 34개국 중에서는 29위로 역시 꼴찌권이다. 더욱 기막힌 것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추세이다. 한국의 순위는 2007의 26위에서 2010년에 62위, 2013년 74위, 2014년 82위로 계속 떨어지고 있다. 항목별로 봐도 2006년 대비 현재 순위가 개선된 항목은 하나도 없다.
현 상태의 제도 경쟁력으로는 앞에서 소개한, 한국경제에 대한 음울한 전망을 불식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신제도경제학의 이론에 의하면 투자 한 단위 늘리는 것보다 경제제도 한 단위 개선하는 것이 경제성장에 더 효과적이다. 만약 그렇다면 정부도 투자를 직접 독려하기 보다는 경제제도를 성장 효율적인 방향으로 개혁하는 일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참고로 2006~2014년 기간 중 공적 제도 중에서 경쟁력 순위 하락폭이 가장 높은 5개 항목을 살펴보면, 정부규제 부담(‘06년 28위→’14년 96위), 정책결정 투명성(77위→133위), 정치인 신뢰(49위→97위), 공무원 의사결정 편파성(37위→82위), 지적재산권 보호(30위→68위) 순이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inhak@ke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