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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 시리즈 6] 경제민주화와 진보주의(Progressivism)의 부활


최근 정치권에서 경제민주화 법안을 쏟아내고 있다. 대기업으로의 경제력집중을 억제하기 위해 회사 소유구조 자체를 ‘사전’에 규제하는 정책, 대기업의 우월적 지위 자체를‘사전’에 규제하는 정책들이 핵심이다. 대기업의 구체적인 행위가 정말로 불공정한지를 따져보려고 하지 않는다. 대기업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최근의 재벌개혁 논쟁을 보면 20세기 초 진보주의 시대(progressive era)인 미국 대공황 시기의 대기업정책이 우리나라에서 재현되는 듯한 생각까지 들 정도다. 실제로 그렇게 하자는 견해도 있다. 당시의 대기업정책이 ‘시장’과 ‘기업’에 대해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0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현재에도 이러한 시각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조합주의(big-is-okay) vs. 이상적 시장주의(small-is-beautiful)


1930년 대공황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책자문단(Brain Trust)에는 서로 대립되는 성향의 진보주의자들이 있었다. 시장메커니즘을 불신하는‘조합주의(corporatism)’적 성향의 사람들과 이와는 반대의 성향을 가진‘이상적 시장경제(ideal economic world)’를 지향 하는 사람들이 혼재되어 대기업정책을 이끌었다. 시장에 대한 신뢰는 다르지만 대기업으로의 경제력집중에 대해 우려하며 국가가 적극적으로 대기업을 규제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견해가 일치했다. 다만 기본 관점이 다르다 보니 국가개입 방법은 달랐다.


조합주의는 자유시장에서의 경쟁메커니즘 자체를 불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방치하면 필연적으로 경제위기를 초래한다고 보고 있다. 시장에서의 자유경쟁보다는 협동을, 개인적 이익보다는 사회전체의 이익을 강조하며 정부가 시장경제를 통제해야만 한다고 본다. 국가적 차원에서 공익(public interest)이 정해지면 개별 회사들은 회사의 이익이 훼손되더라도 따라야만 한다. 회사를 국가의 한 기관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으로 경제력이 집중되어 경쟁이 훼손되는 것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big-is-okay). 다만 사회전체에 이익이 될 수 있도록 국가가 대기업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며 시장을 설계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카르텔을 합법화하여 기업이윤을 보장해 주고 인위적 임금상승을 통해 노동자의 소득을 보장해 주는 정책이 생산물시장과 노동시장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더라도 그것이 사회전체에 좋다고 판단되면 그렇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법적 기반인 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 1933)은 제정 된지 2년 만에 위헌판결을 받았다. 이 법에 기초한 지나친 정부개입은 공황극복에 역효과를 내고 기업의 투자의욕과 기업활동을 위축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루즈벨트의 정책자문단에는‘조합주의’와는 상반된‘이상적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산업화 이전의 농경사회처럼 수많은 소규모 경제주체들 간 완전경쟁이 이루어지는 경제체제를 가장 이상적으로 보고 있었다. 모든 경제력의 집중을 부정적으로 보며 대규모 회사는 민주주의에 위협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경제력 집중으로 인한 절대적인 힘은 필연적으로 남용된다고 믿고 있었다.


이들은 대기업과 정부 간 타협을 통해 공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조합주의에 반대한다. 대기업과의 타협이란 가능하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며 대기업을 사회의 적(enemy) 또는 저주(curse)라고 표현한다. 경쟁을 가장 중요시 하며 이것이 촉진되기 위해서는 특정 기업이 다른 기업들보다 커서는 않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작은 것 자체를 바람직 한 것으로 본다(small-is-beautiful).


우리나라에서 금산분리 정책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견해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글래스 스티걸법(Glass-Steagall Act 1933)제정이 이러한 이상적 경제관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법에서는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하고 상업은행들이 산업자본의 주식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며 은행과 산업의 분리를 지향하고 있다. 이 법은 당시의 포퓰리즘에 기초한 것으로 공황극복과 은행안정성에 기여하지도 못하며 금융발전에 역항하는 실패한 금융개혁 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9년 이 법의 일부조항이 폐지되었다.


반기업정서와 기업의 본질


‘조합주의’는 시장경쟁기능을 신뢰하지 않으므로 그 역할을 국가가 해야 한다고 본다. 반대로‘이상적 시장주의’는 시장경쟁기능을 철저히 신뢰하지만 현실의 시장은 이상적 시장조건과 다르므로 국가가 개입하여 이러한 조건을 갖춰줘야 한다고 본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시장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입장을 취하면서도 대기업 규제를 위해 국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기업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보다는 기업이 크면 위험하므로 어떤 식으로든 국가가 규제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그러나 ‘시장’과 ‘기업’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곧 논의되는 것처럼‘시장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기업’이기 때문이다.‘시장과 기업’간의 이러한 관계를 인식하지 못할 경우 필연적으로 국가의 과잉규제를 초래한다. 현실적 시장의 불완전성을 기업이 아닌 국가가 먼저 개입하여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현실적 시장은 ‘조합주의’에서처럼 신뢰하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이상주의 경제관’에서처럼 자원배분을 전적으로 시장 메커니즘에 맞길 정도로 이상적이지도 않다. 그 중간정도라고 할까. 현실적 시장에서는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이 발생하므로 불완전하다. 시장에서는 계약을 수단으로 거래가 이루어진다. 계약은 서로 필요한 사람을 찾아 협상을 통해 의견 일치를 보는 과정이므로 상당히 번거롭다. 계약비용 또는 거래비용이 소요되는 것이다. 물건을 생산할 때 마다 생산요소 소유자들이 매번 이러한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면 여간 번거롭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 대안으로 생산과 경영에 관련된 포괄적 사항을 계약 당사자중 일방이 일정한 범위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 즉 ‘경영권’을 핵심으로 하는 장기계약을 한번만 체결하면 거래비용을 줄일 수 있다. 이러한 계약구조가 바로 ‘기업의 본질’이다.


업종과 시장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거래비용이 발생하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기업조직형태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기업이 크거나 기업집단 형태를 취한다고 해서, 기업조직과 행동이 상식과 다르다고 해서‘당연히’규제해야 한다고 봐서는 않되는 이유이다. 기업을 바라보는 기본철학과 관점에 따라 대기업의 구조와 행위에 대한 진단이 달라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도 달라지기 마련이다.‘시장’에 대한 극단적 입장만 있을 뿐 시장과 연계된‘기업의 본질’에 대한 철학과 논리가 부족했던 조합주의와 이상적 시장주의가 대공황 당시의 반기업정서와 포퓰리즘에 쉽게 동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대공황 이후 기업의 본질에 대한 경제학적 연구가 본격화 되면서 포퓰리즘이 아닌 학문적 관점에서 기업정책 논의가 시작될 수 있었다.


20세기 초 미국 진보주의(Progressivism) 부활을 경계해야


1930년대의 시장상황과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당시 미국 대공황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전개된 미국 진보주의적 관점을 100년 가까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음은 너무 당연하다. 대기업과 경제력집중을 부정적 관점에서 밖에 볼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조합주의나 이상적 시장주의와 같은 극단적 관점이 현재의 기업정책 논거가 될 수 없음은 너무 당연하다. 최근 시장환경은 급변하고 있고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기업들의 조직과 행동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다. 시장에 대한 적응은 기업생존의 문제이다. 따라서 세계적인 기업법 동향은 기업조직과 경영권에 대한 사전적 규제가 아닌 사후적 규제로 전환되고 있다. 기업들의 운신의 폭을 넓혀주기 위해서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 경제민주화 논의 속에 숨어있을 수도 있는 20세기 초 미국 진보주의(progressive)관점인 ‘조합주의’와 ‘이상적 시장주의’의 부활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기업의 본질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경제민주화 담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sshun@ke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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