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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I 컬럼

전문가들이 펼치는 정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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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육과 청년실업,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경제성장은 자본과 같은 요소의 지속적 증대 또는 기술의 진보와 같은 생산성의 향상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은 실물자본과 인적자본의 지속적인 축적에 의해서 고속성장을 경험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인적자본은 우리나라의 높은 교육열에 의해 지속적으로 축적되었으며, 유래가 없이 높은 대학진학률 등이 이를 확인하고 있기도 하다. 2012년 기준으로 25~34세 대학교육 이수율은 66%, 고교 이수율은 98%에 달한다. 2012년 기준으로 OECD 평균은 각각 39%와 82%이다.(2014년 OECD 교육지표) 교육으로서의 인적자본의 수준은 이미 선진국을 앞서기 시작했다.


최근에 와서 이기는 하지만 생산성본부의 노동생산성 지수는 2011년 이후 하락세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선진국과의 격차가 줄어든다고는 하지만 노동생산성을 OECD 국가와 비교하여도 34개국 중 25위(2013년 기준)로 조사되고 있다. 노동생산성이 다른 선진국에 비하여 낮은 수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최근에 와서는 높은 교육수준으로서의 인적자본 축적이 생산성(노동생산성)을 견인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인적자본의 축적은 기술진보를 적용할 수 있는 인력을 제공하여 기술진보가 경제성장으로 연결되는 역할을 하거나, 또는 첨단기술 창출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적자본 축적이 생산성을 견인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인적자본이 충분히 자기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적자본의 축적이 노동생산성을 견인하지 못하고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서도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대학교육을 포함한 전반적인 인적자본의 질에 관한 문제일 것이고, 둘째는 대졸 이상 고학력 노동에 대한 일자리 창출의 문제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인적자본의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인 반면, 인적자본의의 질은 량을 쫓아가지 못한다. 이는 대부분 대학입시제도의 문제에 기인한다. 수능 성적만이 목표이고 딱 수능 문제만큼만 공부하고 더 이상 나가지도 나갈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아랍어를 가르치는 학교는 전국에 5곳에 불과하지만, 올해 수능 시험에서 제2외국어로 아랍어를 선택한 학생은 6만 5천여 명으로 제2외국어 응시생의 69%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점수 따기 쉬운 것부터 선택하겠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무데도 없다. 게다가 수능은 점점 쉬워져 하나의 문제로 등급이 바뀌고 입학 여부를 좌우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수능이 학생들의 기본적인 탐구능력을 평가하는 것에서 멀어진 것은 공공연한 비밀에도 속하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수능 이후에 발생한다. 여러 연구들에 따르면 다른 요인들을 통제하더라도 수능성적이 대학졸업 후 직장에서 얻는 임금을 좌우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을 피부로 느낀 학생들은 임금을 높게 받으려는 노력 즉, 인적자본의 질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취업확률을 높이려는 시도에 온통 정신을 쏟고 매진한다. 대학생들은 4년 이상 학교를 다니면서 취업을 위해 자격증이나 해외연수 등 동일한 아이템에 획일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대학교에서도 취업에 필요하다면 학생들에 대한 지원을 과감하게 시도하고 있다. 영어회화를 교과목으로 개설하거나 자격증 취득을 지원하거나 일정 수준 이상의 토익점수를 졸업요건으로 요구하기도 한다. 이러한 결과 대학생들은 예상한 것보다 대학을 꽤 오래 다니지만, 그들의 지적 능력은 기대한 만큼 앞서 있지 못하다. 게다가 취업확률에만 매달린 결과 어렵게 취업은 되었지만 자신의 적성에 적합한 일자리와는 거리가 멀게 되어, 어렵게 취업한 일자리를 그만두고 다른 일자리를 찾는 청년 이직률을 높이는 ‘파랑새 신드롬’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정부의 정책은 더 적나라하다. 대학의 평가 항목에는 취업률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으며, 그 평가 비중도 높다. 게다가 정부는 친절하게 대학이 설정할 목표와 방향 및 수단까지도 평가지표를 통해 제시해준다.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평가지표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 대학의 현실이고, 평가를 위해서 대학은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업률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능력을 대학은 가지고 있지 않다. 취업률은 일자리가 늘어나야 상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경쟁 대학 끼리 제로섬게임을 치열하게 할 뿐이다. 대학은 대학의 평가지표에 매달릴 수밖에 없으며, 대학생들의 교육이나 인적자본의 질에 대해서는 그저 닭 쫓던 개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평가를 통한 규제는 규제의 목적인 취업률 제고도 달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인적자본의 질 향상에 사용되어야 할 자원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제 대졸 이상의 고학력 일자리 부족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자. 고학력 노동자의 생산성이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은 고학력 노동자를 사회가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고 남기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고학력 근로자의 공급이 사회가 제공하는 수요에 비하여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학력과잉’이라는 현상을 초래하기도 한다. 대졸 이상 고학력자의 일자리 부족이 발생한 것은 첫째,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인구가 줄어들 것이라는 것을 간과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구 감소 전망을 백안시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장기적인 인구감소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1990년대 중반 정책적으로 대학정원자율화가 실시되었고, 이에 따라 대학생의 수는 신규진입한 대학의 숫자와 함께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 실패로 인하여 2000년대 들어 대학 졸업생의 수는 증가한 반면,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기업의 투자증가율이 둔화되면서 일자리 창출 능력은 오히려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고학력 노동시장에서 공급은 증가하였지만 수요는 이를 쫓아가지 못하게 되어 ‘청년실업’이 만연하게 되었다.


대졸 이상 고학력 청년층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은 기업에게 있는 것이며, 기업은 자신의 비용과 수익에 따라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밖에는 없다. 기업의 생산능력이 증대하지 않는 이상, 지금과 같은 구조 하에서 기업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학력 대학교육을 받은 인구는 증가하지만 인적자본의 질은 개선되지 못하고 대졸 이상의 교육을 받은 청년들은 사회에서 제대로 고용되어 활용되지도 못하는 두 가지 문제점을 동시에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정책은 대학에 취업률을 올리도록 평가를 통해 규제하는 방식을 취하여 전반적인 취업률도 인적자본의 질도 개선하지 못하는 통제된 규제방식만을 고집하고 있으며, 고용정책은 구조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단지 기업이 고용을 늘리도록 기업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시장친화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정책도 실효성이 나타난다고 보기 어렵다.


인적자본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규제방식의 교육정책을 대학자율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대학이 교육이라는 본연의 책무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인적자본의 질을 개선하는 가장 명확한 길로 보인다. 평가지표가 만들어내지 못하는 교육의 질 개선을 이제 대학이 맡아야 한다. 대학교육 시장은 대학과 학생이라는 시장의 구성원에게 맡겨두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또한, 고학력 청년층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고용정책에서 벗어나 기업의 경쟁을 강화하는 규제방식을 취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교과서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과점보다 자유경쟁 시장구조가 생산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시장구조가 자유경쟁에 가깝도록 정책을 취한다면 생산과 고용이 증가하는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그것이 규제를 강화하는 방식이더라도 말이다.


좋은 정책은 정책의 효과를 적은 비용으로 달성하는 정책이지, 규제가 많고 적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제를 취한다면 신중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자주 쓰는 말을 귀담아 둘 필요가 있다. ‘최선의 법으로 우리의 실생활을 더 나아지게 개선하는 것은 어렵지만, 나쁜 법으로 이를 피폐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쉽다.’(원문: It is difficult to make our material condition better by the best law, but it is easy enough to ruin it by bad laws.) 여기서 법을 규제로 바꾼다 하더라도 의미가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은 최선의 규제이다. 교육정책과 고용정책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김영덕 (부산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ydkim@pusan.ac.kr)

* 외부필자 기고는 KERI 칼럼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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