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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는 사회를


몇 년 전 처음으로 연구년 또는 안식년을 받아서 가족과 미국에서 1년을 보냈을 때의 일이다. 미국까지 온 김에 전 가족이 유럽 여행을 해 보겠다고 열흘짜리 단체 여행을 가게 되었다. 단체여행이라고 해서 미국 사람들과 영어로 가는 단체 여행은 아니었고,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을 모아서 한국 여행사의 한국 직원을 따라서 하는 단체 관광이었다.


우리 가족은 동부의 보스턴에서 왔지만, 뉴욕에서 온 가족, 서부 샌프란시스코와 샌디에고에서 온 가족, 남부 조지아에서 온 가족 등 미국 전역의 다양한 지역에서 사는 한인들이 모여서 나름 재미있는 여행을 한 기억이 있다.


이렇게 떠난 유럽 단체 여행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거치게 되는데, 첫날부터 모두들 감탄의 연속이었다. 역사가 짧은 미국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무수한 역사적 유물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유럽의 나라들은 너무도 아름답고 위대해 보였던 것이다. 솔직히 나를 비롯해서 당시 같이 여행하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역시 아름답고 역사와 전통이 있는 유럽에서 살아야지 메마르고 건조한 미국의 삶은 인간다운 것이 못 된다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런데 유럽 여행으로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유럽 예찬론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 날 아침 같이 여행하던 아저씨 한 분이 “아니 커피를 요렇게 조금 주면서 값은 왜 이렇게 비싸죠? 미국 같으면 이 반값으로 두세 배 되는 양의 커피를 마실 수 있는데, 너무 비싸네요.”라고 하신 것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불평이 시작된 것이다. 나도 한국이나 미국에 비해서 엄청나게 비싼 인터넷 사용료 때문에 은근히 화가 나던 터라서 이런 불평에 동참했었다.


결국 열흘간의 아름답고 즐거운 유럽 여행을 마치고 나서 같이 여행했던 미국 거주 한인들이 내린 결론은 유럽은 여행은 가끔 해 볼만 하지만, 사람이 살기에는 유럽보다 미국이 훨씬 좋다는 것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관광하기 좋고 아름답다면 기분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관광하기 좋고 경치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정착해서 살 사람은 별로 없다. 치안이 안전하고 좋은 일자리가 있고 물가가 싸며 자녀 교육의 여건이 좋은 것이 우리의 생활에서 정말로 중요하지 다른 것들은 정말 부수적인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즘 한국 사회는 기업들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업은 윤리적이어야 하고 노조에게도 잘 해야 하며 정부의 정책에도 잘 따라야 한다. 더 나아가 언론에도 잘 보여야 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 잘 가르치고 연구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정말 부족하다. 교육적인 고려보다는 정치적인 고려에서 나온 정부의 정책도 군소리 없이 잘 따라서 해야 하고, 학교 사정도 잘 모르는 언론의 엉뚱한 뭇매를 잘 피해야 하며, 학생들을 진정으로 대표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학생회와 교수들을 진정으로 대표하는지 역시 의심스러운 교수 협의회도 기분 좋게 해 주어야 하고, 자녀들의 입시 문제로 흥분해 있는 고등학교 학부형들의 눈치도 봐야 한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나만의 것이 아니지 않을까?


기업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하여 싸고 좋은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 세계 어느 누구보다도 싸고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실 다른 소소한 일들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야 한다. 전력을 다해서 치열한 경쟁을 하는 입장에 있는 기업들에게 다른 여러 가지 사항들을 요구하는 것은 대학입학 시험을 앞두고 정신없이 공부해야 하는 고3 자녀에게 아침에 신문 돌려서 스스로 용돈 벌고, 집안 청소도 매일 하며, 동네 어르신들 심부름도 하면서 공부하라는 격이 될 수 있다.


이솝우화에 보면 빈약해 보이는 다리를 부끄러워하고 웅장한 뿔을 자랑스러워하던 사슴이 사자에게 쫓기자 빈약해 보이던 다리로 재빨리 도망쳤지만, 결국 자랑스러워하던 뿔이 나뭇가지에 걸려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 경제가 너무 어렵다. 우리 기업들에게 아름다운 뿔을 요구할 때가 아니다. 빈약해 보이지만, 실제로 빨리 뛸 수 있는 다리와 같이 싸고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기업들을 응원해 주어야 한다.


한순구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hahn@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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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필자 기고는 KERI 칼럼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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