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10억 원이 생긴다면 잘못을 하고 1년 정도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고등학생이 100명 중 56명 정도에 달한다는 기사를 접한 후 배금주의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인 것 같아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며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갑을관계”와 “수저계급론“ 논쟁 또한 배금주의와 무관치 않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배금주의를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갑을관계”와 “수저계급론” 논쟁의 공통점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의해 사회계층이 구분되고 있다는 인식이다. 계약 당사자를 가리키는 단순 법률용어였던 갑과 을이 이제는 각각 상위계층과 하위계층을 지칭하는 수직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수직적 관계에서 상위에 있는 자가 하위에 있는 자에게 법적 혹은 도덕적 잘못을 저지르는 행위인 이른바 “갑질”은 상위자는 “가진 자,” 하위자는 “못 가진 자”라는 빈부의 개념이 더해져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가해하는 부당행위라는 의미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갑이라는 표현은 기업의 오너 등 “가진 자”에게, 을이라는 표현은 비정규직 근로자 등 “못 가진 자”에게 대부분 쓰이고 있다는 점이 이러한 사실을 대변한다. 사실 갑을관계는 상대방이 누구인가에 따라 변하는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고소득자든 저소득자든 누구나 갑의 위치에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점은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상위자이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부당행위가 있을 수는 있지만, 갑이든 을이든 상관없이 갑이 하는 부당 행위는 을이 해도 역시 부당하다는 점 또한 간과되고 있다. 즉, “갑질”에는 고소득자가 저소득자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된다는 일방향의 규범적 판단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소득자는 저소득자와 달리 특별하다는 일종의 배금주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이유야 어떻든 고소득자는 저소득자에 비해 더 엄격한 도덕적 책무를 요구받을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여야 하는가는 개인의 선택 문제이다.
수저계급론은 부유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를 ‘금수저,’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를 “흙수저”라 칭하며 “갑을관계”에 비해 더욱 노골적으로 배금주의를 드러낸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을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으로부터 나오는 금전으로 국한시키면서 개인의 특성과 관련된 유전적 대물림은 논외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저계급론은 부모와 자녀 간 이루어지는 부(富)의 대물림, 즉 소득의 세대 간 이동성에 주목한다. 수저계급론에 따르면 세대 간 부의 대물림은 입에 물고 태어난 수저로 대표된다. 부모가 부유하면 자식에게 금수저, 심지어 다이아몬드 수저를 줄 수 있지만 부모가 가난하면 자식에게 흙수저를 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부모 소득과 자녀 소득 간의 상관관계가 매우 크다고 가정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세대 간 이동성은 OECD 17개국 중 8위라는 연구결과도 있듯이 다른 국가와 비교해보았을 때 우리나라의 세대 간 이동성은 양호한 편이다. 나는 비록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나의 자식에게는 금수저를 물려줄 수 있는 확률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나쁘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치와 상관없이 사회구성원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저소득계층에서 고소득계층으로의 이동가능성이 낮다면 이 역시 해결해야 할 사회 문제일 것이다.
주관적 계층이동성을 포함한 사회이동성은 일반적으로 사회의 경제 여건에 따라 좌우된다. 높은 청년실업률, 소득불균등 정도의 증가 등은 사회이동성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는 경기가 좋아지고 소득불균등 정도가 개선되면 사회이동성이 제고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경제 성장세의 회복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경제 여건의 개선보다도 사회이동성 제고에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수단은 바로 교육이다. 하지만 사교육을 통해 부모의 부가 자식에게 대물림 되면서 계층이동 가능성을 높이는 전통적 교육의 역할은 퇴색된 지 오래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 이러한 현상을 악순환 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교육 정책은 이러한 악순환을 끊어내는데 실패했다. 배금주의가 청소년에게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 역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거의 매번 대학입시제도가 바뀐다. 하지만 입시제도가 아닌 교육이 바뀌어야 할 때이다. 교육의 사회이동성 역할을 회복시키기 위한 고민이 여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고 있음을 교육당국은 명심하길 바란다.
이진영(한국경제연구원 국가비전연구실 부연구위원 / jinylee@ke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