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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실패’만도 못한 ‘국회실패’, 어떻게 해야 하나


국가의 관료나 정치인들이 시장에 대하여 개입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하는 말이 있다. ‘시장의 실패’라는 말이 그것이다. ‘시장의 실패’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친숙한 공공재 문제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시장행위자들이 자신의 이기주의에 따라 행동하다 보니 사유재는 잘 생산하는데, 사회전체에 필요한 공공재생산에는 등한히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다.

아담 스미스가『국부론』에서 썼듯이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하는 것은 정육점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주인의 개인적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자신들의 이익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즉 정육점 주인이 자신의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다 보니 그 시간까지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의 논리이지만 공공재 문제는 다르다. ‘내’가 굳이 기여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기여하면 맑은 강물이나 깨끗한 산소와 같은 공공재가 산출되는데 ‘내’가 일부러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노력을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문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면 결국 맑은 강물이나 깨끗한 공기는 아예 생산되지 않거나 적게 생산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장행위자의 이기주의를 보완하거나 수정하기 위하여 국가가 특유의 ‘보이는 손’을 가지고 개입한다는 것이 정치인들의 논리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시장의 실패’를 교정할 국가는 과연 완전한 것일까. 시장행위자의 이기심이나 단견적 사고를 치유할 수 있으려면 국가의 공직자들이나 정치인들은 당연히 공익을 지향하는 존재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경이 또 다른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상황이 되어 둘 다 개천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보면 시장행위자들의 이기심보다 그 이기심을 바로잡겠다고 나선 정치인들의 이기심이나 정략적 사고가 더 저급하고 심각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바로 우리 국회의 행태가 대표적 사례가 아니겠는가?

최근 국회의원들에 대한 유죄판결로는 국회실패 해결책이 안돼

최근 법원이 국회에서 폭력을 행사한 책임을 물어 민주당 문학진,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들이 지난해 12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막기 위해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장 출입문을 해머로 부수고 의원 명패를 깨는 폭력을 행사한 데 대해 각각 200만 원과 5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한 것이다. 이번 판결로 두 의원은 계속 국회의원 배지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안도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무지’중에도 그런 ‘무지’가 없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경구를 이 시점에서 엄숙하게 상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입법부와는 다른 입장에 있는 사법부가 국회 내에서 일어난 폭력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었을까 하는 점을 두고두고 곱씹어야 한다.

우리 국회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물론 국회도 불완전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인 만큼 아무리 유권자들에 의해 뽑힌 선량(選良)이라고 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국회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잘못을 어떻게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다. 자신들의 결함에 대하여 스스로 정화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 준다면 잘못 그 자체와는 별개로 국민들의 신뢰를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단 금배지인데…”하면서 국회전체가 ‘자기식구 감싸기’로 일관한다면 우리 의회민주주의의 앞날은 어둡다. 이번에 검찰은 국회에서 일어난 폭력에 대해 국회의 자율권을 존중한다는 취지로 사법처리를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 국회는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왔던가. 국회 윤리위원회는 1992년 14대 국회 이후 17년 동안 의원 품위 손상이나 부적절한 언행 때문에 제소된 150여 건 가운데 단 1건도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은 도덕불감증을 보였다. 이것은 국회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죄책감은커녕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생생한 증거다. 이런 현실에서 국회 폭력과 관련해 현역 의원들과 정당의 당직자들에게 비록 벌금형이긴 하지만 유죄 판결이 나온 것은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국회 폭력은 한국의 후진국형 국회의 벌거벗은 모습을 세계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국가의 품위를 크게 떨어뜨렸다. 또한 폭력을 일삼는 우리 국회에 대해 “그런 국회가 왜 필요하냐”며 자조하는 분위기마저 넘쳐흘렀다. 또 “국회의원이 되려면 근육질을 키워야한다”는 소리가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번 폭력국회의원들에 대한 벌금형은 그 잘못에 비추어 볼 때 너무 가벼운 처벌로 면죄부를 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될 정도다. '해머를 동원한 점은 있지만 문고리를 부순 것에 불과하다' 등의 이유로 두 의원에게 각각 벌금 300만 원과 100만 원을 구형한 검찰의 태도도 유감이다. ‘근거없는 봐주기’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는 충분하다. 폭력배가 폭력을 행사한다면, 물론 그것도 심각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폭력배가 폭력을 행사하는 이외에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국회는 다르다. 이성적 판단과 품위있는 토론을 통해 여야 간에 좁힐 수 있는 차이는 좁혀가고 근본적인 입장차이로 인하여 도저히 합의할 수 없는 문제라면 ‘불일치하기로 합의하는 것’이 규범적 원칙이다. 합의가 안 될 때마다 폭언이 난무하고 몸싸움이 벌어지는 ‘근육질 국회’가 어떻게 조폭조직과 다르다고 할 것인가.

단상 점거 폭력이나 막말 같은 언어폭력은 너무나 반복되다 보니 우리 국회의 정체성과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국민의 대표들이 모인 국회에서 막가는 행패와 저질 언어가 하도 판을 쳐서 초등학교 학생들조차 국회견학을 할 엄두조차 못내고 박물관 견학이나 청와대 견학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이야말로 ‘시장의 실패’보다 큰 ‘국회의 실패’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막상 폭력을 저지른 장본인들은 스스로 반성하기는커녕 “다른 국회의원들이 몸 사리고 하지 않는 악역(惡役)을 스스로 했다”는 자부심마저 느끼고 있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안될 말이다. 국회 폭력이란 일반 시정잡배의 폭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한 것이다. 시정의 폭력배들은 우리가 뽑은 대표가 아니지만 폭력을 행사한 국회의원들은 우리가 뽑은 대표이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이 폭력을 위임한 적이 없는데 폭력을 행사하고도 그에 대한 책임의식조차 없는 국회라면 ‘죽은 국회’다.

우리사회에는 잘못된 관행이 있다.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 때는 불법행위가 없었는지에 대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지만 일단 국회의원이 되고나면 무슨 잘못을 하던 간에 솜방망이 처벌로 끝나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불균형사태를 빨리 시정해야한다. 단순히 국회의원이 되는 것보다 국회의원이 되서 어떤 일을 하는가 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박효종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parkp@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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