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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해회사 거품, 사기에 놀아난 시장의 광기였나?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서 사실은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상식의 오류사전』까지 나와 있는 것이리라. 금융위기의 역사와 관련해서도 그런 사례가 적지 않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왜곡되기도 하고 때로는 무지와 우연의 합작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금융위기의 역사에서 광기와 거품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그래서 그 사건의 명칭에도 ‘거품’이라는 단어가 붙여진 ‘남해회사 거품(South Sea Bubble)’의 전말을 살펴보자.

금융위기의 역사책으로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찰스 킨들버거(Charles P. Kindleberger, 1910~2003)의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Manias, Panics, and Crashes: a History of Financial Crisis)』는 제5판에서 역사상 10대 금융거품 리스트에 ‘튤립마니아(Tulipmania)’에 이어 두 번째로 ‘영국 남해회사 거품’을 꼽고 있다. 미시시피 거품과 함께 1930년대 대공황 이전에 발생한 3대 금융거품 중 하나인 셈이다.1)

영국을 중심으로 쓴 금융위기의 역사에서는 예외 없이 최초의 위기로 불리는 이 거품에 대해 킨들버거는 단순한 사기사건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존 블런트와 그의 내부자들은 그들이 자신에게 발행한 주식에서 - 그것도 그 주식을 담보로 차입한 자금으로 산 - 이익을 얻고자 했다. 자본이득을 실현하자 부동산 매수에 그 자금을 사용했다. 붕괴 시점에 블런트는 여섯 건의 부동산 매입 계약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남해회사 주식투자로 2만 파운드에 달하는 엄청난 손실을 본 후 “나는 천체의 운동을 계산할 수는 있지만, 사람들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고 했다는 아이작 뉴턴(Sir Isaac Newton, 1642~1727)의 일화를 인용하면서 1720년 남해회사 주식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소용돌이를 시장의 광기로 몰고 간다.

이 같은 해석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04년에 출판된 『최초의 붕괴: 남해 거품의 교훈』에서 저자 데일 교수도 남해 거품을 2000년의 닷컴 버블과 비교하면서 남해회사에서 존 블런트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일들을 엔론이나 월드콤사에서 케네스 레이(Kenneth Lay)와 버나드 에버스(Bernard Ebbers)가 저지른 회계부정과 사기행각과 같은 부류로 치부했다.

그러나 일개 회사의 주식을 둘러싼 금융사기가 어떻게 역사상 10대 금융 거품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금융사기 이상의 무엇이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2)

남해회사는 1711년 남아메리카 스페인 식민지와의 무역거래 독점권을 보유한 일반 주식회사로 설립되었지만 그 설립과정을 보면 단순한 무역회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영국에서는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1701~1714)을 치르면서 쌓인 단기국채 950만 파운드의 원리금 상환문제가 당면과제로 부상하면서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 내각은 남해회사를 설립하여 국채-주식 전환 프로그램으로 단기국채를 연리 6%의 영구 연금증서로 전환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 같은 국채-주식 전환방식은 잉글랜드은행과 동인도회사 주식을 매개로 성공한 전례가 있는 방식이었다. 남해회사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어서 단기국채 보유자의 97%가 남해회사 주식으로 전환하였고, 남해회사는 보유 국채에 대한 정부로부터의 이자수입으로 안정적 현금흐름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아메리카와의 독점적 무역으로 기대되는 이익은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1713년 평화조약으로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Treaties of Utrecht)은 기대에 미치지 못해 남해회사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에 대한 노예공급권(Asiento)과 연 1회 무역선을 보낼 수 있는 권리(Navio de Permiso)를 얻는 정도였는데 스페인과의 적대관계는 지속되었기 때문에 무역에서는 큰 수익을 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회사 경영진은 국채전환 사업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1719년 초에도 연금증서 형태의 국채 170만 파운드를 주식으로 전환한 남해회사는 1720년 1월, 개인이 갖고 있던 모든 국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는 매우 의욕적인 계획을 추진한다. 당시 영국 정부의 총 부채는 대략 5천만 파운드였고 이 중 1,830만 파운드는 3대 공기업(잉글랜드은행 340만 파운드, 동인도회사 320만 파운드, 남해회사 1,170만 파운드) 수중에 있었다. 개인 보유 국채 중 1,650만 파운드는 중도상환 가능한 채무였고 1,500만 파운드는 중도상환이 불가능한 만기 72~87년의 장기 혹은 잔존 만기 22년의 단기 연금증서였다. 이 연금증서는 까다로운 조건으로 사실상 거래가 불가능한 데다 정부는 그 이자지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높은 이자를 받지만 거래가 잘 안 되는 채권을 수익은 낮지만 유동성이 높은 남해회사 주식으로 전환하는 프로그램은 이해 관계자 모두에게 충분한 유인이 있는 것이었다.

1720년 1월 21일 재무장관 존 아이스래비(John Aislabie)경이 이 계획안을 의회에 제출하여 국채/주식 전환 프로젝트를 공식화하자 연초 128파운드였던 액면가 100파운드의 남해회사 주식가격이 오르기 시작하였고, 2월 중순에는 50% 가까이 상승한 187파운드를 기록했다. 3월 21일 국채차환법안이 의회를 통과하자 주가는 300파운드를 상회했다. 하원 논의과정에서의 쟁점은 국채와 주식 간의 전환비율 결정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 수년 후 최초의 내각책임제 총리가 된 정치인)경, 리처드 스틸(Richard Steele)경, 아처볼드 허치슨(Archebald Hutcheson) 등 남해회사 주가의 거품 형성을 우려한 몇몇 의원들은 전환비율을 법으로 정해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부의 반대로 남해회사는 전환을 위해 발행하는 신주의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 재량권을 갖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은 정부, 남해회사 경영진 및 기존 주주, 연금증서 보유자 모두가 주식가격의 상승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남해회사가 인수한 국채에 대해 정부는 1727년까지 연리 5%의 이자를, 그 이후는 4%를 지불하기로 하여 정부의 이자지급 부담을 크게 줄이게 된다. 남해회사가 국채인수 권한을 확보하기 위해 지불하는 공식적 비용은 국채 3100만 파운드의 주식전환에 성공할 경우 750만 파운드(잉글랜드은행과의 인수권 경쟁으로 300만 파운드에서 오른 금액)를 정부에 지불 약속한 것이다. 그 이외에도 130만 파운드에 달하는 뇌물이 옵션 형태로 각료ㆍ국회의원ㆍ왕실 등에 제공되었다. 이 같은 특혜를 받지 못한 다른 국회의원들과 고위 관료들도 공모주(현금) 청약에서 주식배정을 받아 자본이득을 누릴 기회를 얻었다. 4월 7일 국채차환법안이 국왕의 재가를 얻은 직후부터 8월까지 네 차례에 걸친 현금청약으로 발행된 10만 주 중 17% 이상이 의원ㆍ귀족ㆍ고위관료들의 몫이었다. 특히 붐의 초기인 4월 중 이루어진 제1차와 2차 청약에서 300파운드와 400파운드에, 그것도 회사의 대출을 받아 할부로 자기 돈 한 푼 안들이고 주식을 배정받은 318명의 의원과 131명의 귀족들도 당시로는 상당한 특혜를 받은 셈이다.

남해회사는 4월 말 1차로 국채/주식 전환신청을 받았고, 5월 19일 채권별로 전환가격을 발표하여 신청자들이 수락여부를 결정토록 하였다. 그 이후 8월에도 두 차례에 걸쳐 전환신청을 받아 연금증서의 80%와 중도상환 가능 국채의 85%를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남해회사의 주식가격도 국채/주식 전환 프로젝트의 진행과정에 따라 움직였다. 프로젝트의 공식화, 법안의 의회통과, 법안의 국왕 재가 등 사업의 구체화 고비마다 큰 폭으로 상승하던 주가가 1차에서 국채/주식 전환신청을 한 대부분의 채권자들이 남해회사가 제시한 전환가격을 수락하여 남해회사의 국채매입이 성공할 것이 확실시되자 6월초에는 700파운드대로 폭등했다. 회사의 이익배당 준비 작업을 위해 6월 24일부터 8월 22일까지 주주명의개서가 중단되어 이 기간 동안 주식의 현물거래가격은 없었으며, 8월말 주가는 775파운드였다. 그러나 4월의 1, 2차 공모주 청약에서 할부로 주식을 매입했던 투자자들이 할부금 납입일이 도래하면서 주식을 팔기 시작하고, 거품규제법의 표적이 된 몇몇 회사에 영장이 발부되어 시장이 불안해진 데다 설상가상으로 외국자본의 이탈까지 겹치면서 주가는 폭락하여 한 달 만인 10월 1일 290파운드로 떨어지기에 이른다.3) 다시 말해 8월말 1억6400만 파운드에 달하던 회사의 시장가치 중 1억300만 파운드가 한 달 사이에 증발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끝이 아니었고 그해 말 주가는 150파운드 대까지 폭락했다.

그 동안 남해회사 거품에 대해 흔히 알려진 스토리에는 의회도·정부도·왕실도 없었다. 시장의 광기를 개탄하는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다니엘 디포우의 경고, 주식 열풍에 휩싸인 사회에 대한 역겨움과 그 와중에서 주식투자로 돈을 벌고 있는 자신의 이중적 태도에 혼란스러워하는 시인 알렉산더 포프의 서신들, 앞서 이미 언급한 과학자 뉴턴의 일화,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면 우리도 어느 정도는 그들을 닮아야 한다’며 투기에 가담하는 투자자 등, 당시 영국 사회 전체가 얼마나 비이성적 광기에 놀아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데에만 열중했다. 그러나 남해회사 주식가격 상승에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거품 법안이 의회를 통과한 6월 9일 국왕은 존 블런트에게 그의 국가에 대한 공로를 인정해 준남작(準男爵, baronet) 작위를 수여했다는 사실을 시장 실패론자들은 애써 외면하고 언급하지 않는다. 사실 대부분의 남해회사 투자자들은 국왕과 왕세자, 왕의 애인, 장관들과 고위 관리들 그리고 유력 의원들이 하는 것을 따라했으나, 단지 그들보다 한발 늦어 그들이 파는 주식을 샀던 것뿐이다. 거품이 꺼지자 의회는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희생양을 찾았고 블런트를 위시한 남해회사 이사들, 아이스래비경 그리고 몇몇 고위 관리들의 재산 200만 파운드를 몰수하고 할부 주식 청약자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렇게 국채차환법안에 근거해서 추진된 남해회사의 국채/주식 전환사업이 남해회사 거품이라는 단순 사기사건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니까 남해회사의 설립에서부터 남해회사 거품의 생성과 붕괴까지 전 과정의 중심에 있었던 의회와 정부는 모든 책임을 회사의 경영진과 사기에 놀아난 비이성적 시장에 전가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김우택 (한림대학교 명예교수, wtkim@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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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의 미시시피 거품(1720)에 대해서는 필자의 “미시시피 거품, 시장의 광기였나 정책의 실패였나?”(KERI

칼럼 2009. 10. 6 게재) 참조.

2) 이하의 역사적 사실들은 Chancellor(1999), Garber(2000), Kindleberger(1996), Smant 등에 근거한 것임.

3) 거품규제법은 의회의 입법이나 국왕의 허가 없는 주식회사의 설립을 금지하고 기존의 주식회사도 허가에 명

시되지 않은 영업행위나 신규 주식발행을 금하는 법으로, 1720년 6월 9일 의회를 통과하고 11일 국왕 재가로

발효되었다가 1825년 6월에 철회되었다. 이 법의 입법취지는 투기억제에 있었던 것이기보다는 남해회사 주가

상승을 뒷받침하는 현금출자 자금이 다른 곳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아 남해회사를 돕고자 취해진 조치라는 해

석이 유력하다.


<참고문헌>

Edward Chancellor, Devil Take the Hindmost: A History of Financial Speculation. Farrar, Straus and Giroux, 1999.

Richard Dale, The First Crash: Lessons from the South Sea Bubb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4.

Peter M. Garber, Famous First Bubbles: The Fundamentals of Early Manias. The MIT Press, 2000.

Charles P. Kindleberger, Manias, Panics, and Crashes: A History of Financial Crises, Third Ed. John Wiley, 1996.

D. J. C. Smant, Famous First Bubbles? South Sea Bubble. http://people.few.eur.nl/smant/m-economics

/bubbles/southse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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